𝘊𝘪𝘴𝘵𝘶𝘴
일명 자살하는 꽃. 약 25개의 종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잡종과 원예종이 있다. 지중해 분지와 카나리아 제도에 분포하며 햇빛이 내리쬐는 개방된 지역의 건조하고 바위가 있는 토양에 적응했다. 시스투스 속의 다양한 종들은 35℃ 정도가 발화점인 휘발성 기름을 발산한다. 이는 지중해성 기후의 마르고 더운 여름 환경에서 자연발화하여 자신을 포함한 주변 식물들을 불에 타 죽게 만들지만, 시스투스의 씨앗은 내화성이 있어 시스투스와 주변 식물들이 타고 남은 재를 양분 삼아 자라난다.
꽃말은 '인기', '나는 내일 죽습니다', '임박한 죽음'.
시스투스
아아 작렬하는 나의 태양아
잿빛으로 물든 나의 파랑아
검게 불타버린 들판에 안겨
나는 여기 있습니다.
원환의 굴레에 갇힌 나의 운명이여
떠맡듯이 받아버린 나의 시간이여
내가 짓밟고 올라선 생명의 무게가
메마른 바람을 부르네
의미 없이 주워섬긴 나의 명분이여
운명책에 깊이 각인된 생존본능이여
내가 감싸고 태어난 생명의 무게가
뜨거운 태양을 부르네
이해와 반목과
원망 그리고 또
다시 여름에는 우리들의 꽃이 피어날 거야
아아 뿌리박힌 나의 바위야
저기 추방당한 나의 들판아
서글픈 그늘에 목을 졸린 채
나는 여기 있습니다.
아아 자그마한 나의 희망아
다시 돌려받은 나의 절망아
한 조각 하늘을 뱃속에 품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아아 축복받은 나의 아이야
아아 저주받을 나의 아이야
모두 태워버릴 나의 들판아
나는 내일 죽습니다.
아아 축복받은 나의 아이야
아아 저주받을 나의 아이야
태양 한 움큼을 토해내고서
나는 내일 죽습니다.
별다소니 님께서 주최하신 2023년 꽃말합작 참여곡입니다. '자살하는 꽃'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시스투스〉를 주제로 만들었습니다.
마노 명의로 첫 번째 디지털 EP음반 《Angel of Death》를 발매하고서 첫 번째 블로그 포스팅이네요. 다 핑계처럼 느껴지시겠지만, 바쁜 일정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굵직한 일만 따져봐도 8월 5일 보카보카 라이브에 작곡가로서 참여했고, 8월 26일 서울 팝콘에서 에뚜왈(étoile)의 기타리스트로서 공연에 섰습니다. 장비에 대한 것만 해도 2021년 말에 스윙 프리즘을 방출한 이후로 키젤 커스텀 SH6 '람이'와 사이키델리듬 사이코마스터 '초록이'를 새로 영입하고 심지어 초록이는 픽업을 펜더 CuNiFe 와이드 레인지 험버커 픽업으로 교체했는데 포스팅을 못 하고 있네요. 자잘하게 들어가고 나간 이펙터도 꽤 많고요.
지금부터 쓸 글은 〈시스투스〉와 관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당신이 극단적인 신비평주의자여서 작가에 대한 것을 포함한 작품 생성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신다거나, 그게 아니어도 원곡자의 헛소리 따위에 내 감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정도에서 뒤로 돌아가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농담이 아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원작자가 밝힌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권위가 부여된다는 사실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도 망설여집니다. 뭐 제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도 아닙니다만.
곡을 만들고 나면 설명을 엄청나게 길게 달았던 시절도 있었고 특히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 처음 만들었던 2018년 정도는 지금 제가 봐도 도가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품에 대한 건 작품이 말하게 내버려 두자' 시절도 있었습니다. 특히 〈날개〉에 대해 말을 너무 아꼈던 걸 여러 번 후회했습니다. 〈시스투스〉에 대해서는 오랜만의 자작곡이기도 하고, 블로그에 오랜만에 쓰는 글이기도 해서, 조금 긴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블로그 포스팅만 보신 분은 짐작 못 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식물 관련 분야, 정확히는 원예생명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처음 꽃말합작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을 때, 식물이 본진이어서 오히려 망설였던 감도 있습니다. 식물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꽃을 피운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처절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자작곡인 〈나비의 일생〉 때도 그랬고 〈거미의 사랑〉 때도 그랬고 〈날개〉 때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 '꽃들은 노래하고 나비는 춤춘다' 식의 의인화 곁들여진 비유를 그런 이유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중 '나비'에 대한 생각은 여러 번 곡으로 풀어냈고 앞으로도 풀어내게 될 것 같습니다만, '꽃'에 대한 건 오히려 더 강력한 자기 검열에 막혀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도 본질적으로 '꽃들은 노래하고 나비는 춤춘다' 식의 이야기랑 차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풀어낸 적이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꽃말합작이 개인적으로 큰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합작 주최해 주신 별다소니 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합작에 참여할지 말지를 고민할 때부터, 소재는 '시스투스'로 확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살짝 의역된 꽃말과 함께 생태가 '짤방'으로 돌아다니던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어서인지 꽃 자체보다 꽃말로 유명하다는 느낌 식물이기도 했고, 뭔가 가장 나 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여를 결정할 때 정도의 최초 구상은, 지금 결과물보다는 많이 가벼운 느낌이었습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정도?
곡의 최초 구상 단계에서 Foals의 노래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Mountain At My Gates〉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결과물을 놓고 보면 크게 상관없는 작품이 나온 것 같습니다만,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Mountain At My Gates〉를 들으면서 왠지 모르게 "나의 들판"이라는 가사는 꼭 넣겠다고 정했습니다. "my ~"가 곡에 자주 나와서 그런 걸까요? 따지고 보면 화자의 들판도 아닙니다만.
〈시스투스〉에 "나의 들판"을 포함해서 1인칭 단수 소유격이 자주 나오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를 자주 사용하는 한국어 화자 입장에서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외국어를 직역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시스투스〉에 "우리"는 딱 한 번 등장하죠. 그 구절의 맨 앞에서 등장하는 "이해"는 'Understand'의 이해로 해석해도 되고 '이해득실'의 이해로 해석해도 됩니다. 거기에 들어갈 두 음절의 단어를 찾고 나서 저는 한국어가 굉장히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자어를 많이 쓰지만 한문을 딱히 표기해주지 않도록 발전한 현재 표기법까지 포함해서요. 물론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뒤에 이어지는 가사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결과는 똑같습니다만.
가사 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가 너무 깊게 언급하는 건 작가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레퍼런스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리하여 축제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영국스러운 인디 록을 생각하면서 곡을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평소 즐겨 듣던 노래들이 어디 가질 않아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니까 곡이 점점 깊은 곳으로 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영국스러운' 정도만 남고 사이키델릭 · 프로그레시브 록 쪽으로 깊이 들어간 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짧은 모티브를 계속 반복하면서 세뇌하는 것 같은 분위기의 미니멀리즘 한 음악을 좋아합니다. 어쨌거나 '나의 들판을 돌려줘' 정도 생각하면서 최초 구상을 시작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미의 사랑〉과 〈날개〉처럼 시스투스라는 종의 생태에 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곡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사실 합작 참여할 때부터 내심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거미의 사랑〉과 〈날개〉 모두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상당히 장황하게 빌드업을 하는 느낌의 곡이었는데, 〈시스투스〉도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만, 문득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사연 같은 거 구구절절 풀어놓는 것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격적으로 녹음 시작하기 전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녹음을 하면서는 국카스텐의 곡들을, 특히 〈Violet Wand〉와 〈Vitriol〉을 많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스러운'까지 흐릿해져 버린 건 국카스텐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기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전에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23년 2분기 가장 화제였던 일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작품은 『수성의 마녀』 2쿨과 『최애의 아이』였던 것 같은데, 저도 상당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장르가 애니메이션과 음악으로 다르긴 하지만, 〈시스투스〉를 작업하면서 두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아서요. 개인적으로 ' ~에 빚지고 있다'는 표현을 참 좋아하는데, 빚지고 있는 것을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지는 항상 너무 어렵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꽃말합작 최초 공개 때도 많이들 반응해 주신 기타 트랙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죠. 이쯤에서 이 글 괜히 읽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뒤로가기를 누르세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고유명사가 많이 나올 테니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하고 넘어가죠.
왼쪽부터 PRS Wood Library Custom 24-08 '파랑이', Fender Made in Japan Hybrid 50s Telecaster '하양이', Kiesel SH6 '람이', Psychederhythm Psychomaster '초록이'입니다. 기타 이름을 짓는 원리는 에릭 클랩튼의 브라우니(Brownie) · 블랙키(Blackie)와 같습니다. 순서는 영입한 순서입니다. 람이와 초록이는 각각 작년 5월, 작년 11월입니다만, 아직 포스팅을 하지 못했네요. 조만간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죠.
EP음반 《Angel of Death》를 발매하면서, 작업 방식이 바뀌기 전의 옛날 곡들을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었는데, 특히 〈Samael's Truck〉과 〈Love of a Spider〉를 다시 녹음하면서 일부러 신경 썼던 부분은 위의 기타 4대를 적재적소에 모두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Love of a Spider〉는 워낙 길고 장르가 계속 바뀌는 곡이라 그렇겠지 하고 넘어갈 만합니다만, 〈Samael's Truck〉은 기타 4대 개성이 순간순간 반짝이도록 많은 신경을 쓴 곡입니다. 이 부분 신경 쓰시면서 들으면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역시 텔레캐스터 엄청 깽깽거리네. 아하 이래서 사이키델리즘이구나! 키젤 소리 정말 독보적이네. 역시 PRS는 최고야! 같은...
아무튼 그렇게 5곡을 모은 EP음반을 발매하고 나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을 때, 문득 계속 기타 바꿔가면서 녹음하기가 무지하게 귀찮아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옵션들을 모조리 때려 박아서 커스터마이징 한 키젤 SH6 '람이' 한 대만 가지고 모든 기타 트랙의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녹음 시작할 때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밴드인 2002년에서 2010년 사이 포큐파인 트리의 사운드를 따라 해 보려고 피에조 픽업을 활용한 어쿠스틱 톤과 마그네틱 픽업을 활용한 일렉트릭 기타 게인 톤을 블렌딩 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깔고 갔습니다. 이 소리는 곡 전체적으로 깔려 있습니다만, 특히 벌스 부분에서 부각됩니다.
그러다가 곡의 장르도 바뀌고 'John Wesley가 투어링 게스트로 참여하던 시절의 포큐파인 트리 사운드' 파트가 많이 축약되었습니다만, 이왕 깔아놓은 사운드는 남기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믹싱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불러온 업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고요.
기타 사운드에 대한 지식이 있으시다면 〈시스투스〉를 들으시면서, 풀 코드 잡고 스트로크 하는 주법 · 아르페지오 주법 · 단음 커팅 주법 · 팜 뮤트 주법 모두 텔레캐스터와 아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2010년 이후 포큐파인 트리 활동을 잠정 중단했던 시절의 스티븐 윌슨이 텔레캐스터를 아주 열심히 활용하셨었죠. 저도 일펜 하이브리드 50s 텔레캐스터 '하양이'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뭐랄까... 텔레캐스터를 가지고 녹음하기가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 소리'가 나긴 하는데...
세미 할로우 애쉬 바디 · 로스티드 메이플 넥 · 에보니 지판 · 퀼티드 메이플 탑 · 피에조 픽업 옵션 힙샷 트레몰로 브릿지의 키젤 SH6 람이를 커스텀하면서 개인적으로 목표했던 것이 '씬라인 텔레캐스터와 PRS의 장점을 합친 통기타 소리도 나는 일렉트릭 기타'였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되어서 스스로는 '만능 기타'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만능이라 오히려 활용을 잘 안 하게 되는 감이 있달까요?
현재 저의 드림 기타는 위에 언급한 사양의 PRS Custom 24 Piezo인데... 프라이빗 스톡 아니면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오더 넣기도 힘들고 가격도 제가 감당 못할 수준이라, 키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모든 트랙을 키젤 SH6 '람이'로 다 녹음하고 〈시스투스〉에 키보드(신시사이저) 소리를 넣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패드이고 그 외 곡에서 드럼 베이스 보컬 백색소음을 제외한 모든 소리는 기타 소리입니다! 메인 멜로디의 보컬로이드 조교를 마무리할 때쯤, 저는 아래의 영상을 보게 됩니다.
그냥 '펜더의 픽업 광고 영상이네' 하고 넘겼어야 했는데... 영상 시작하는 순간부터 Michael Lemmo가 연주하는 프론트 픽업 소리에 저는 팍 꽂혀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 딜러가 정식 수입하지 않는 픽업이라 무려 $399.99 하는 픽업 세트를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양싸대기를 맞으면서 직구로 사버리고 말았습니다.
원래 Psychederhythm 이 이름은 볼 때마다 본토 발음으로 사이케데리즈무라고 읽어야 할지, 한국인이니까 사이키델리듬으로 읽어야 할지 고민된단 말이죠 Psychomaster에 순정으로 장착되어 있는 픽업은 캐나다의 Sigil Pickups가 Psychederhythm만을 위해 특별 제작하는 Psychomaster Modern입니다. 분명 아주 좋은 픽업이었습니다만, 뭔가 큰 틀에서 텔레캐스터와 겹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고민이 늘어가던 시기에 펜더 CuNiFe Wide Range Jazzmaster 픽업을 보게 된 겁니다.
그리하여 지난 8월 9일에 미국에서 도착한 와이드 레인지 험버커 픽업과 Hosco CTS 500㏀ 포텐셔미터 2개를 들고 영미권 인터넷 커뮤니티의 많은 사람들이 재즈마스터 or 와이드 레인지 험버커 픽업에는 1㏁ 포텐셔미터를 조합하는 것이 전통이자 정석이다! 라고 강력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펜더 홈페이지 상품설명에도 500㏀ 또는 1㏁ 포텐셔미터를 취향 따라 선택하라고 되어있었고, 무엇보다 오디오 테이퍼 짧은 샤프트 1㏁ 포텐셔미터는 Hosco 카탈로그에만 있는 환상종인 것 같아서 무난한 500㏀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픽업 교체를 하러 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픽업 교체를 하고 와서, 이런저런 조건에서 테스트를 해보자 하고 DAW를 열고 여러 앰프 + 캐비닛 시뮬을 돌려보다가 바로 〈시스투스〉 프로젝트에 개조된 '초록이'가 투입됩니다. 믿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녹음하는 날 아침까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단 〈시스투스〉의 오른쪽에서 들리는 단음 커팅은 개조된 '초록이' 하프톤을 마샬 플렉시 앰프와 조합한 소리입니다. 이건 상당히 '뻔한' 재즈마스터 기타의 사용법이라서 특별히 보탤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 기타를 추가하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왼쪽에 옥타브 주법 기타 트랙을 하나 추가했는데, 이건 개조된 '초록이' 리어 픽업을 피베이 5150 앰프와 조합했습니다. '재즈마스터를 피베이 5150에 연결한다고?' 싶으시겠지만, 의외로 잘 소화하더군요. 와이드 레인지 험버커 픽업이 대단한 건지 피베이 5150 시뮬이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개조된 '초록이'의 데뷔로는 완벽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시스투스〉 곡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기타 자랑 이야기가 더 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에 찔려서 〈시스투스〉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스투스의 원산지는 지중해 분지와 카나리아 제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중해 연안'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한데 사전에서 '지중해 분지'라니까 그렇게 씁니다. 그렇지만 한국어 가사 곡이고 아마도 한국인들이 들을 거라 지역적 고증을 완벽히 살리기보다는 누가 들어도 익숙한 배경이 연상되는 화이트 노이즈들을 활용했습니다. 불 소리와 매미 소리, 바람 부는 숲의 새소리가 그렇게 선택되었습니다.
엔딩 부분은, 처음에 성냥 긁으면서 불꽃이 일어나는 소리로 곡을 끊으면서 시작 지점으로 다시 루프 되는 백색 소음 효과를 사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냥 긁는 소리의 어택이 길어서 그런지 강렬함이 생각보다 부족하고 듣는 입장에서 '성냥'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아서 그렇다고 라이터 소리는 너무 분위기를 깨고 말이죠 이런저런 시도 끝에 '핑거 스냅' 소리를 활용했습니다. 2018년 이후 대부분의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핑거 스냅'하면 아마도 '타노스'를 바로 연상하는 암묵의 문화적 합의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최소 페이즈 3까지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또한 '영향받은 작품'에 포함시켜야겠네요.
〈시스투스〉 곡의 길이는 유튜브가 인코딩하는 과정에서 영상이 뭔가 손상되지 않았다면 정확히 4:00.000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으니 혹시 물 붓고 4분 기다려야 하는 컵라면을 조리하실 때 〈시스투스〉를 재생하시면 아주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끝에서 시작으로 루프 하는 곡입니다. 유튜브 한국어 설정에서는 영상을 우클릭하면 '연속 재생'이라는 뭔가 오역 같은 이름으로 되어 있는 '반복 재생' 기능을 활용하시면 제가 곡을 만들면서 의도한 바에 좀 더 가깝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곡을 어떻게 감상하실지는 온전히 당신의 자유입니다.
추가: 1시간 루프 버전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업로드했습니다. (2023. 08. 28. 19:15 KST)
만약에 여기까지 오셨다면, 먼저 거의 대부분이 쓸모없는 이야기인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이번 〈시스투스〉에 대해서는 영향받은 그러니까 빚지고 있는 작품들을 음악이 아닌 것들까지 포함해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비단 〈시스투스〉가 아니어도 제가 정말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니 기회가 되신다면 꼭 감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사족의 사족인 기타 이야기는, '블로그에 관련해서 포스팅을 해야 하는데...' 하면서 계속 미루고 있던 와중에, 꽃말합작 최초 공개 반응을 보면서 간단하게 하고 넘어가야겠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깊은 이야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재미없게 느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쉽게 풀어냈는데, 다 적고 보니 그냥 기타 자랑글이 된 것 같네요. 사실 자랑이 맞습니다. 제 기타들은 정말 최고입니다. 꽃말합작 공개 당일은 코로나 판데믹 이후로 제가 기타 연주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 날이라 개인적으로 절대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3년 후 · 5년 후에 다시 보면, 지금 제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이 글을 써서 공개적으로 게시한 일을 후회할 것 같습니다. 퇴고를 하면서 제가 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 하는 사람의 길을 선택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글을 또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 북소리』에서 말한 "내가 왜 그런 소설을 썼는지조차 나는 잘 모른다. 여하튼 그때는 그것밖에 쓸 수 없었다. 좋든 싫든 나로서는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라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오리지널 곡 〈시스투스〉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라고 작가로서 감히 생각합니다. 부디 한정된 인생에 제 작품을 만난 것이 좋은 경험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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